헝가리 뮤지컬

디진 나레이터 있으면 소개시켜줘 - 어느 아나키스트 이야기

헝뮤아카이브 2023. 6. 18.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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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 없는 건 쇤부른콘 자체인 것 같기도

이번 쇤베른 콘서트에서 루케니를 맡은 야콥스가 밝은 갈발 곱슬이길래 우우 근본없다 쿠녀석이 선녀였다(이유 : 번역공장 공장장님이 먼저 보러 갔을 때 쿠로쉬 잘하는데 대충하더라 하길래 가끔 쿠녀석이라 불렀음) 하면서 어디 딴 동네에서도 먹을 수 있는 루케니 또 없나 들쑤시고 다녔는데요.. 최근 도쿄 갔을 때 시간 비어서 해외뮤 앨범CD 많다는 얘기 듣고 히비야쪽 다카라즈카 MD샵에 들렀거든요. 부다페 앨범도 있나 했는데 집에 진즉 있는 헝모촤CD랑 2001년 다른 극장에서 낸 지앤하 CD있더라구요. 그리고 그 외엔 없음. 하기야 일본에서 헝가리뮤CD 찾는 한국인이라니 양심도 없지.
 
여튼 초면이지만 이 분 루케니 했을 것 같은데 포카 뒤지다가 정말 루케니를 맡은 젠느 엽서도 기념으로 사고... 20주년 엘리 가이드북 사서 성하라는 재일한국인 배우 루케니 한 거 취향인데.. 했다가 번역공장장에게 저런... 또 신현준계를 잡았군.. 송진내 확인하는 시간이나 가지고.
 
아 그리고 그쪽 돌아다니다가 봤는데, 최근 거기서 루돌프 마이어링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우타가타의 사랑'이 올라왔더라구요. 당시엔 그런갑다 코 후볐는데 등장 배역 보니 파이퍼 원형으로 추정되는 마부가 있어서 대체 왜???  자세히 보니 예전에 언급했던 20세기 초 영화에서도 영향 받은 것 같더라구요. 그러다가 아 왜 나레이터 원형이 되는 인물에 이렇게나 진심인가 성찰했는데 아마 루케니 때문인 듯.
 
본인이 하는 이야기를 지긋지긋하게 여기는 나레이터 & 그 이야기 속에만 등장하는 관념적 인물 맛있잖아요. 그런데 이걸 괴식처럼 엮어서 먹는 사람이 있고... 이건 오타쿠들의 심금을 울리는 소재다! 여기는 제작사들이 있고... 2010년 모차르트! 이후로 창뮤에서 인외관념 멘헤라 인물들이 넘쳐났으나 오..먹던 것만 먹을게요.. 편식하는 오타쿠가 되어버림. 그 중 그래도 흥미로웠던 설정은 이야기 속 권선징악의 인물화였는데 이건 연극이었고. 근데 뮤지컬에서 나레이터 유행은 20세기에 끝나서 최근엔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 쿤체가 엘리 쓰면서 영향을 받은 것도 에비타의 체 였으니까.
8090 쯔음엔 손드하임도 인투더우즈의 나레이터, 어쌔신의 오스왈드-발라디어로 이어지는 애들도 있었던 거 같은데. 최근엔 하데스타운의 헤르메스나 해밀턴의 에런 버는 나레이터 라기보단 대담자에 더 가까운 인상이라. 이렇게 까다롭게 굴다가 말라죽지
 
여튼 1n년 넘게 파다 보니 이젠 더 이상 먹을 것도 없어서 스스로 척척척 떡밥 찾아 옆동네 나레이터와 엮다보니 이제 뭐가 날조고 뭐가 진짜인지 헷갈려져서. 당시 역사적 배경 찾다가 루케니(실존인물)의 내력 얘기해보는 이야기.
이렇게 자아 강한 놈이라서 똑같이 자아 강한 황후와 엮어 쿤체가 이딴 식으로 넣었군 가볍게 읽으시면 좋습니다
 
 
 
예전에 헝엘리 루케니 얘기는 여기서 함

뮤지컬 엘리자벳 줄거리로 덕질하는 루케니 (2)

저의 엘리자벳 최애는 루케니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헝가리판 엘리자벳 기반으로 배우 및 실존인물 및 덕질 헛소리가 좀 길어질 예정이라 초반은 그냥 넘기셔도 됩니다. 1. 루케니 본체들 이

hungmusarc.tistory.com


 
1. 에고 넘치는 실존인물의 범행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루케니가 본인의 생전 삶을 말하는 장면은 막판 씨씨와 조우할 때 뿐입니다. 당연히 이 뮤지컬은 엘리자벳이 주인공이니!
본인 왈, 오를레앙의 필립 왕자가 목표였으나 머무르고 있던 제네바에 오지 않았고, 돈도 없어서 걍 머무르다가 신문을 통해 씨씨의 방문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귀족을 대상으로 범행을 저질렀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대가 본인과 마찬가지로 귀족에 대해 경멸적인 시선을 가진 옆동네 황후였고. 
 

 
거기가 바로 중간에 만들다가 현대미술로 빠진 것 같은 씨씨 동상있는 보 리바지 호텔. 너무 어이없는 조형이라 오히려 웃김.
 
극에서 범행무기는 파일(꼬챙이)로 소개되는데요. 심문기록에서 왜 칼은 안 썼냐는 물음에, 여기까지 오느라 칼 살 돈이 없어서 파일을 갈아서 썼다고. 찌르고 바로 도주했으나, 씨씨는 코르셋과 다이어트, 문신으로 인해 이미 고통에 익숙해져서 찔린 게 아니라 뭔 이상한 놈에게 소매치기 당하면서 밀쳐진 것이라고만 생각하며 여행을 재개했으나, 2시간 후 몸상태가 급격히 나빠져서 배의 갑판에서 상처를 확인하고 사망.
 
그는 신문에서 황후의 도착을 봤다고 주장했으나, 사실 씨씨는 당시 가명으로 여행 중이었음. 황후의 방문은 진작 제네바 사람들의 입소문을 탔고, 범행일인 9월 10일에서야 광고된 것이었다고 함. 황후를 찌른 암살범은 범행 당일 시민들의 제보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이 과정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이건 아래에서 자서전 얘기하면서 더 자세히 후술.
 
 

당시 신문기록. 엘리 초연 루케니였던 이단 프리먼이 저 스타일 똑같이 함

극 중에서 루케니는 목매달아 죽었으나, 사실 바로 죽진 않고. 12년동안 스위스 감옥에서 무기징역으로 수감되었습니다. 당사자는 사형선고 받고 참수형 당해 기록에 남길 바랐지만. 잡히고 나서 수감된 제네바 감옥에선 1871년에 진즉 사형제가 페지되었거든요. 그래서 제네바 대신 사형제가 남아있던 루체른 주로 이송되길 바랐으나 연방의회가 꺼져 돌아가 해서 제네바 감옥이 무덤이 되어버림.
 

그동안 감옥에서 뭐했냐면.. 사형시켜줘 찡찡댔던 게 무색하게도 나름 독학하며 잘 지냈음. 이탈리아계였으나 프랑스 태생이라 프랑스어 공부하고, 책도 읽고. 나름 얌전히 사상범 모범수처럼 지내면서 본인 유년기에 대한 자서전을 쓰고 있었는데요. 어느날 자서전을 쓰던 노트가 사라짐. 본인과 사이가 나빴던 한 간수가 범인이라 의심하면서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다가 감옥 폭동에도 참여하면서 지하 독방에 수감됨. 거기 독방에서 벨트로 목 매달고 자살하고.
뮤지컬에선 밧줄로 나오지만 그럼 가오가 없잖아요. 게다가 2층에선 보이지도 않는다!
 
이후 행방불명된 자서전은 루케니가 의심했던 간수의 물건 양도받아 정리하던 수집가가 발견되고. 오 새로운 기록! 출간하려고 했으나 본래 소유주였던 수집가 아버지가 재수없게 범죄자 일기를 왜 세상에 내보이냐며 반대하면서 무산. 그래서 원래 소유주인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약 103세의 나이에 사망할 때까지 존버하다가...장수하셨네.... 98년도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자서전 전문은 엘리자벳 뮤지컬이 올라올 때쯤 밝혀졌으나, 굳이? 같은 내용이라서 극에 추가되진 않음. 하기야 누가 구질구질한 황후암살자 인생 따윌 궁금해 해! 하지만 저는 그시대 미시사 궁금하니 더 적어봄.
 
 
 
2. 자서전 - 19세기 말 버려진 고아에 관한 이야기
 

이건 프랑스어판. 독일판도 있음

 
황후와 암살범 모두 시대를 잘못 타고난 강한 에고의 소유자라서.. 둘 다 사후 기록물이 20세기 되어서야 출판 되었는데, 엘리의 기록물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여 '티타니아'라는 필명으로 아킬레우스 덕질하며 내면의 우울과 자아에 쓴 시집이라면, 루케니 껀 사회에 반박하기 위해 쓴 기록물이란 점에서 좀 다릅니다.
 
제목도 있었음. '19세기 말 버려진 고아에 관한 이야기' 거 제목부터 자기연민 가득하네.. 감옥에서 배운 프랑스어로 쓴 내용은 은유, 인용, 공격적이면서도 경멸에 찬 어조로 아이러니함을 비꼬는 과거사였는데, 쓰게 된 계기가 있었음. 
 
 

이 할배가 자서전의 계기가 됨

당시 이탈리아 의사이자 법의학자인 롬브로소의 주장 때문. 본인 책에다 루케니가 저지른 범죄의 기원은 신체적 특성 때문이며, 정신이상 범죄자들과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고 써서. 그 당시로서는 사회의 하층계급이 상류층에게 (그들이 보기에) 동기나 배후없이 암살했다는 건 큰 충격이었고, 날 때부터 미친 범죄자였다고 받아들이는 게 더 쉬우니까. 게다가 당시에 이탈리아 아나키스트들이 움베르토 1세나 프랑스 대통령 암살하고 다녀서 이탈리아의 범죄자 관상은 따로 있다! 이런 식으로 몰아가려고 했나봄. 그래서 당시 유행했던 골상학 가져다대며 님 머리통 보니까 본투비 범죄자네여ㅇㅇ 하고 먼저 어그로 끌어버림.
 
그렇게 국제사회에서 도덕적 괴물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천성이 문제다, 하니 내 대가리 직접 보지도 않은 놈들이 뭘 안다고?! 빡쳐서 반박을 위해 기록을 남김.
이민자로서의 삶. 이탈리아 군대에서의 경험, 제대 후에도 보장된 일자리 없이 일용직만 전전하던 삶. 그리고 어린시절 사생아로서 보호가정으로 전전했던 과거를 풀면서, 반역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난 때문에 생긴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 그리고 원고에서 본인의 행동은 가난한 이들, 고아들, 귀족으로 고통받은 이들을 위한 이타주의와 해방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사후 발굴되어 출판된 자서전 제목이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라는 것도 그 이유였고.

 
거기서 언급된 본인의 과거는 이럼. 모친은 루이지아 루케니라는 파리에서 일하던 이탈리아의 파르마 출신의 하녀였음. 일하던 집안의 사생아를 가지자, 모친은 파리에서 비밀리에 출산 후 보호소에 맡기고선 미국으로 떠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고. 이후 모친쪽 고향인 파르마로 이동하여 거기에서 자랐다고 함. 그 후 불안정한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자랐는데, 학교에서 읽고 쓰기는 조금 배웠으나 공부할 시간도 없이 아동노동자로 일했고.

성인이 된 후엔 유럽을 전전하다 취리히, 빈, 부다페스트에선 6개월동안 철도 노동자로도 일했고. 계속 떠돌아다니다가 입영 문제 때문에 1894년, 경찰차 타고 군대까지 산지직송됨. 몬페라토 제 13기병연대에 입대하여 약 3년 반 동안 있었는데, 군대가 괜찮았는지 이탈리아 카세르타에서 1년, 나폴리에서 2년,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아프리카의 (현) 에리트리아의 마사와에서도 6개월동안 자원해서 머물렀음. 1896년 제대 직전에 군인이 공무원에 지원하면 전역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간수에 지원했으나 떨어지고, 대신 부대의 상관이었던 팔레르모 귀족의 하인직으로 일하게 됨. 
 
그렇게 1898년 3월 말까지 아라곤 왕자 아래에서 일하다가, 자의로 그만두고 이탈리아를 떠돌다가 5월 쯔음에 스위스의 로잔으로 향함. 거기서도 건설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일하다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음. 병원 직원이 소지품에서 아나키스트와 관련된 일기장을 확인했으나 이미 스위스쪽은 다양한 망명자와 난민으로 익숙해서 굳이..? 해서 체포하진 않았다고.
여튼 거기 있으면서 여행 다니다가 책 읽거나 신문 읽다가 이탈리아 현지의 무정부주의자들과 만나면서 친해짐. 그래서 신문에 실릴 만한 행동을 통한 선전이라는 아이디어는 이러한 맥락에서 구체화 되었고.
근데 오를레앙의 헨리공이 없어서 제네바 체류하다가 엘리 만나고..9월 10일에 모두가 다 아는 그 일이 일어남.

 
 
3. 황후암살범의 심문과 재판과정
 

1898년 9월의 연방회의 기록물

수사관 모두 이 꼬질한 이탈리아계 노동자가 단독범행을 저지를 리 없다! 배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 주변 네임드 이탈리아계 아나키스트는 다 조사받다고 함. 심문기록(링크)에서 몇 번이고 니 배후있지? 같은 질문받자 빡쳐서 '배후? 내가 내 자신의 배후다' 질러버림. 귀족을 향한 범행 자체가 목적이라서 찌르고 도망친 건, 잡히고 나서 경찰에게 인도당하길 원했지. 격분한 시민들에게 맞아죽는 건 피하기 위해서라고 함 (실제로도 그런 일이 발생해서)
 
 
부르주아계 언론은 만장일치로 이 사건을 맹렬히 비난했으나 사회주의계 언론은 미적지근하게 본인들 하고 싶은 얘기나 계속 했음.  행위 자체에 분석을 하며 '무정부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이 만들어낸 과실임. 비밀경찰들 쓸모없다 걍 없애라', '사회주의와 아나키스트는 다르거든요? 듣던 사회주의자 기분나쁘네 혼동ㄴㄴ', '아무리 부르주아를 혐오해도 살인은 안된다! 이런 모든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주의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갑자기요?)',  '인간이 생명이 신성하다면 노동의 희생자로 사망한 무수한 프롤레타리아를 생각해라!' 이런 식으로 지들 하고픈 얘기만 했고.
여튼 이 사건 때문이 아니더라도 유사한 사건들은 많았기에 이를 계기로 유럽 내에서 아나키즘에 대한 위험을 논의하려는 국제회의가 진행되기도 했음
 
 
재판 시작되면서 대다수는 배후에 대한 논의였고, 루케니의 행동 요약에 관한 건 2가지 답변만 남았음. 범행동기에 대한 이유는 '비참한 불행' 이라는 것과, 범죄에 대해 후회하냐는 물음에 '지상의 위대한 이들은 19세기동안 불행한 이들을 박해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가?' 라며 사상범같은 답변만 했음.

판결에선 이렇게 기록함. 얜 똑띠네ㅇㅇ 몸도 건강하고.. 같은 동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육도 받았고..읽고 쓸 줄 알고.... 크게 범죄이력도 없고... 근데 얜 무정부주의의 증오에 휩쓸려서 이런 일을 저지른 거ㅇㅇ 어디 아픈 애도 아니라서 정신병원 ㄴㄴ 사회에 보호하기 위해 감옥에 넣으려고 함ㅇㅇ 목숨은 살려주되 자유는 영원히 묻히게 하겠다며 종신형을 선고함. 귀족을 암살해서 아나키스트 동지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던 본인에겐 뭔 개소리인가 싶겠지만.

제네바에선 1871년에 사형제가 폐지되었고, 제네바 주에서 판결받았으니 20년형을 선고받았을 테지만 외부 압력 때문에 주법을 위반해서 종신형이 가해졌음. 그것 때문에 청문회 보고서에 의하면 일반 여성들을 죽인 살인자들은 종신형 선고 받지도 않는데 판결에 차등을 두는 게 옳냐 니네 이럴거면 판결 똑바로 해라~~ 얘기 나왔나봄

하지만 당시엔 개인적 원한이 아니라 사회계급에 불만을 가진 하층계급이 고위층을 향해 단독범행을 일으킬 수 있단 걸 믿기 싫었던지 무정부주의 운동과 범죄와의 연관성을 축소해서 보려고 했고. 스위스에서도 우리 나라 중 무정부주의자는 지금껏 없었다! 얘는 딴 나라 사람이니 스위스는 여전히 안전하다! 이런식으로 행복회로 돌리려고 서둘러 판결을 끝냄. 이후 루케니는 그의 무덤이 될 제네바 주교구 감옥으로 이송됨. 

 
 
 
4. 12년 후 감옥에서의 최후
 

독방의 그림

제네바의 감옥은 규율이 엄격해서 침묵이 절대적인 곳이었다고 함. 수감자 사이의 소통도 처벌하는 등 규정이 빡셌고. 그동안 어떻게든 적응해서 초기 1년 동안 독방에 있으면서도 징계받지 않고. 감옥 내 공장에서 노동하면서 받은 임금은 대부분 책 구입만 했다고 함. 보호관찰자 중 한 명이 남긴 기록에선 '그는 감옥에 갇힌 이후 어떠한 불만도 제기하지 않고, 복종하는 모습만 보여줘서 굳이 관찰할 이유가 없다. (..) 그가 자신의 범죄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믿으나, 범죄를 저지른 걸 후회한다면 그로 인해 그에게 초래한 결과 뿐 일 것이다.'

근데 와중에 감옥에서 머여 나 사형선고 받았잖어 여기 제네바 법 말고 사형법 남아있는 루체른 법 기준에 맞춰서 재판 해주시도록 친절히 부탁드립니다 꾸준히 외부에다 편지쓰며 어그로 끔. 기밀 보고서 기록물에도 쟤 황후를 죽였으니 당연히 사형받겠지 했는데 사형선고 못 받은 거 후회 중이네여 한결 같았다고 함. 그런데 실존인물이 그렇게 간청했던 참수는 단두대가 아니라 수술대에서 발생함.
 
그렇게 10년 넘게 걍 조용히 있었는데 감옥 총책임자가 바뀌면서 상황이 바뀌었음. 트집 잡혀 공장 노동도 할 수 없이 침대도, 의자도 없이 완전히 어둠만 있는 독방에 갇히다가 간수의 폭력에 의해 병 걸리고. 10월 19일 지하독방에서 벨트에 목매달아 자살함.
근데 어디선 몇 가지 모순이 있다는 설도 있음. 수감자에게 벨트가 왜 있대? 빛도 보이지 않는 지하감옥에서 환기장치용 창살에다 어떻게 매달았대? 독방 죄수는 감시 철저히 한다면서 왜 2시간 동안 감시하지 않았대? 이런 의혹도 있긴한데.. 이건 음모론이긴 함. 머리가 목 없이 이상하게 잘려 보관된 건 무정부주의자가 간수나 오스트리아 비밀기관에게 살해당했다! 라는 가설에 힘을 보탠건데, 이건 또다른 골상학자 ver2 때문에 그런 거긴 함.
 
이 자아 강한 암살자는 골상학자 롬브로소랑 대판 싸워서 자서전을 쓴 거 였는데 골상학자ver2가 얘 디지고 나서 연구하겠다고 머리 가지고 뻘짓한 거임. 물론 우생학의 일종이었던 골상학으로는 별다른 발견은 못하고 걍 똑같은디? 하면서 시신은 제네바의 교도소에 묻히는 동안 머리는 제네바 법의학 연구소의 소장품으로 옮겨지고. 그 후 보존된 표본으로 1985년에 빈의 나렌투름으로 옮겨져서 잊혀졌다가 2000년대가 되어서야 제대로 된 빈 공동묘지에 묻혀졌다고. 
 
 
 
번외. 이탈리아 아나키즘의 계보
 

러시아계 아나키스트 혁명가이자 철학자

 
이 당시 이탈리아의 아나키즘은 바쿠닌의 영향이 컸고 루케니 역시 바쿠닌의 글을 읽었다고 주장함. 파괴는 곧 새로운 창조라며 마르크스랑도 논쟁하며, '모든 것은 소멸할 것이다,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제외하고' 라며 베토벤 곡 말고 다 디졌으면ㅇㅇ 하는 극단적인 자유주의자였음. 그래서 1880~1890년의 이탈리아 아나키즘은 바쿠닌의 영향으로 단체보다 개인으로 행동하며 제도와 권위를 공격하는 것이었으나.. 이탈리아 아니키즘도 같이 얘기해야 해서...여긴 패쓰!
 

 
대신 이러한 이탈리아 아나키즘의 계보는 1901년 이탈리아 이주민 노동자 아나키스트인 촐고츠에게 이어졌으며, 미국 대통령 맥킨리를 암살한 그는 손드하임의 뮤지컬로 다시 나왔으며 저는 여전히 이시국 뮤지컬 어쌔신 4연을 기다리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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